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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보다 크리스마스 이브날에 더 설레여 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마찬가지로, 축구 경기도 시작된 후보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경기 시작 전이 더 설레이는 법이다. 경기가 있는 날이면,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은 이상 경기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토요일 3시 경기를 예로 들어보자. 9시, 기상. (토요일이니까 늦잠 좀 자야지) 아침식사를 하면서 노트북을 켜 여러 축구 사이트 및 언론사에 접속해 당일 경기가 있는 팀들을 파악하고 부상현황을 본다. 같은 축구팬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씻고 유니폼을 입으며 복장을 갖춘다. 그러고 나면 어느새 12시. Football Focus를 봐야 할 시간이다. 프리미어리그 프리뷰 성격의 프로그램으로 BBC에서 방영한다. 그걸 보고 나서 집을 나서면 딱 3시 경기에 알맞게, 2시 좀 전에 경기장에 도착할 수 있다.
어디서부터 출발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가 살고 있었던 곳에서 에미레이츠까지는 넉넉잡아 40분 정도가 걸렸다. 북서부 런던지역이다 보니 종종 우리 동네에서도 경기날 아스날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언젠가 지나가던 아스날 레플을 입은 한 할아버지께서 똑같이 레플을 입고 있는 나를 보면서 본인 가슴의 앰블럼을 탕탕 쳐보이기도 했다. 그런 곳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오늘이 아스날 경기있는 날'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은 피카디리 라인으로의 환승역인 킹스 크로스 역에서부터다. 환승통로를 지남과 함께 사방에서 레드 앤 화이트 유니폼을 입고 스카프를 두른 사람들이 총총 몰려든다. 이런 날엔 축구와는 상관없는 '일반인'들을 위해서 '축구 관람객이 아니신 분은 여기를 이용하세요'라는 안내문이 역사에 붙는다. 에미레이츠 주변의 지하철역들은 필연적으로 아스날의 경기 일정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다. 경기가 있는 날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건 바로 '축구 관람객'이기 때문이다.
환승통로를 지나 피카디리 라인의 킹스 크로스 승강장으로 가면, 그때부턴 여긴 현실세계와 유리된 곳이다. 레드 앤 화이트를 입은 사람들이 점묘화를 그려놓은 듯 좁은 플랫폼에 꽉꽉 들어차 있는 모습. 도착하는 열차 안에도 같은 종류의 사람들로 가득하다. 가끔은 너무 가득 들어찬 아스날 팬들 때문에 열차를 놓쳐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다가 포르투전에 10분인가 늦게 들어갔었다..) 승강장을 가득 메운 팬들을 바라보면 참 제각각들이다. 남자, 여자, 노인, 어린아이, 커플, 백인, 흑인, 터키계, 인도계, 동양인. 하지만 이런 정체성은 지금부터는 잠시 안녕이다. 지금부터 중요한 건 '구너'라는 아이덴티티 하나 뿐이니까.
안그래도 좁은 런던의 튜브 안에 발 디딜 틈도 없이 들어찬 구너들은 낮은 소리로 경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떤 사람은 썬지나 메일지, 혹은 다른 축구지를 보고 있다. 여기서 경기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경우도 많다. 남이 보고 있는 썬지를 옆이나 앞에서 훔쳐보기도 한다. 어차피 다들 보고 있는 건 똑같으니까. 아스날은 어떤가, 라이벌 팀들은 어떤가. 난 한번도 아스날 팬이 아닌 상태에서 이렇게 아스날 팬으로 들어찬 열차에 타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가끔 참 궁금했다. 이 열차 안에 타고 있는 일부 '보통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고.
언제 한번 이 '아스날 열차'에 토튼햄 핫스퍼 팬이 탄 적이 있었다. 챔피언스 리그 매치데이였기 때문에 그 날 걔네는 경기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 객차 안에 있던 모든 아스날 팬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는 당당하게 앉아 있었더랬다. 아스날 역에서 내리자마자 객차 안에 타고 있던 모든 팬들이 '아까 그 스퍼스놈 뭐래?' 하고 같이 온 사람들에게 물었다. 그 광경이 참 웃겼다. 왜 객차 안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냐고? 싸움이 나는 건 누구나 사절이니까.
아스날 역에서 내리면 당장 에미레이츠까지 한달음에 달려가고픈 마음이 굴뚝같지만,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한 2시간쯤 일찍 가면 모를까. 방금 타고 온 열차에도 아스날 팬들이 한무더기였고 앞으로 올 열차도 그리고 그 전에 온 열차도 다 그럴텐데, 좁은 아스날 역에 그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나갈 수 있을 리란 만무. 가본 사람은 알겠지만 경찰들이 통제하기도 이 편이 더 쉬워서인지, 그리고 또한 홈 팬과 원정 팬과 서로 마주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홈 팬들이 지나갈수 있는 아스날 역의 통로는 매우 좁다. 거의 4열종대로 행군하는 꼴이다. 누군가는 거기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교통카드를 찍고 나오면 드디어 길 하나만 남았다. 역 앞은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음식 판매대, 각종 굿즈를 파는 노점상, 삼삼오오 모여서 사람을 기다리거나 뭔가를 먹고 있는 팬들. 벌써 귀국한지 1년 반이 지났지만 아직도 기억한다. 아스날 역에서 나와서 아스날 역에서 왼쪽으로 직진해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하이버리 구장이고, 오른쪽으로 직진해 좌회전한 후 쭉 따라가면 에미레이츠다. 나보다 앞서 걷고 있는 팬들. 나보다 뒤에서 걷고 있는 팬들. 내 옆에서 걷는 팬들. 어떤 사람은 파브레가스 마킹을. 어떤 사람은 반 페르시 마킹을. 어떤 사람은 언비튼 마킹을. 어떤 사람은 과거 레전드들의 마킹을. 자기 이름을 마킹한 사람. Mrs. Fabregas라는 기상천외한 마킹도 봤다. I 8 SPURS. GOONER 4 LIFE. 그 사람의 이름은 모를지라도 마킹은 이미 그 사람의 정체성이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오른쪽에 올 아스날 샵이 있고, 올 아스날 샵 위로 계단이 나 있는데 그 계단을 오르면 에미레이츠가 눈에 들어온다. 한발자국씩 올라갈 때마다 에미레이츠는 가까워지고, 팬들의 발걸음은 빨라지며 --거의 뛰어가는 수준인 사람도 있다-- 노랫소리는 커진다. 위 아 바이 파 더 그레이트스 팀, 아스날 FC. 레드 아미, 레드 아미. 점점 커지는 에미레이츠를 바라보며 그 노래를 옆, 앞, 뒤에서 함께 걷는 팬들과 불러본 적이 없는 사람은 결코 이 기분을 모를 것이다. 난 이 순간을 제일 사랑했다.
경기장에 도착하면 들어가기 전에 사야 할 것이 있다. 매치 프로그램. 안에 들어가도 팔지만 사람이 많다. 밖에 있는 판매대를 이용하는 게 낫다. 매치 프로그램을 읽으면서 내가 들어가야 할 구역까지 걷는다. 색깔별로 4구역이 나뉘어지고 그 안에서 알파벳으로 구역이 나뉜다. (조만간 이 색깔별 구역을 아스날과 관련된 이름으로 바꾼다고 한다.) 멤버쉽 카드를 찍고 turnstile을 밀고 들어가는 순간
,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은 안녕이 된다. 여기가 현실 세계와 '아스날 월드'의 경계선이다. 한번 turnstile을 밀고 들어가면, 경기가 끝나기 전까지 나올 수 없다. 그때부터는 진정한 성지가 시작되는 것이고 이 세계 안에서는 아스날보다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는 어떤 규칙도 통하지 않고 아스날이 지배하는 세계다.
내가 축구를 보면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골이 들어갈 때 경기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벌떡 일어나며 YES!!를 외치는 순간이다. 이건 거의 본능적인 것임에 틀림없다. 누구나 일어나고 누구나 그렇게 소리지른다. 가끔 경기 하이라이트를 볼 때 눈을 감고 골 직후의 그 관중들의 소리만 듣기도 한다. 관중이 없다면 축구경기장은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까지 함께 온 '동지'들, 여기서 함께 하고 있는 '동지'들이 나의 관람을 특별하게 한다.
영국에 있을 때 펍에서 보거나 인터넷으로 본 경기도 있었지만 기억에 가장 남는 건 역시 경기장에서 본 것들이다. 헐시티전에서 패배를 목도하고 기가 차서 울었던 기억 (그때 난 내가 에미레이츠에서 아스날이 지는 걸 보게 되리라곤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다), 더럽게 못한 경기 다음에 포르투전에서 4-0으로 이기는 거 보고 또 좋다고 웃은 기억, 스퍼스전 4-4의 충격, 아스톤 빌라전 대패, 위건전 에부에 야유 사건까지.
내게 있어 에미레이츠는 아스날 그 자체였고 아스날의 축구와 나의 관람을 특별하게 해 주는 곳이었으며 경기가 있는 날마다 세계의 중심이 되는 곳이었다. 아스날이 맨유한테 1-0으로 간발의 차로 지고 있는데 누군가가 "야, 런던 브릿지가 폭파됐대"라고 말한다 해도 아무도 관심가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한다. "지금 그게 문제냐? 아스날이 맨유한테 지고 있는데?" 라는 반응이 이 경기장 안에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영국 생활동안 마음에 스크래치가 생기는 일이 있으면 혼자서 에미레이츠를 찾았다. 경기장 안에 들어가지 않아도 에미레이츠 앞 벤치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정리되곤 했다. 어두운 밤에 찾아오면 조명 켜진 구장과 조명 켜진 앰블럼을 보면서 앉아있곤 했다. 귀국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간 곳도 이곳이었다.
지금 가면 또 많은 부분이 바뀌었겠지. 오늘 밤따라 여기가 많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