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d Old Arsenal

에미레이츠와 함께한 4개월 <part 1>

Louisie 2008. 11. 18. 08:29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난 포스팅의 우울함도 떨쳐 버리고 심심한 국대주간에 심심풀이 땅콩이나 할 겸(?) 지난 4개월동안 에미레이츠에서 겪은 경험담을 풀어놓을까 합니다. '아직 4개월밖에 안 됐어?' 라고 반문하실 분도 있으시겠지만 제가 런던에 도착한 건 4월이어도 경기를 보기 시작한 건 08/09시즌이 시작한 8월부터였으니 아직 4개월밖에 안 됐지요. 생각해보면 정말 경기를 보고 가는 개월수는 그리 많지 않군요. 이제 한달 남짓 있으면 아스날과도 작별을 고해야 한다니 마음이 아픕니다. ㅠㅠ 아무튼 두 편으로 나눠서 전편은 경기 외적인 것들, 후편은 이제까지 에미레이츠에서 본 10경기에 대해서 이야기할 생각입니다. 오늘은 경기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 썰을 풀어 보죠. : )


4 months with the Emirates <part 1: off-pitch>

1. Before the match

영국의 축구 경기는 오후 3시 킥오프가 기본입니다. 게다가 오후 3시 경기는 TV 중계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죠. 좀 이해가 안가는 희한한 법이긴 한데 저도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게 전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3시 경기 중계는 해외 위성을 이용해야만 볼 수 있습니다. 주로 미국 세탄타를 이용하고는 하죠-_-;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경기도 3시 경기입니다. 12시 45분 킥오프는 너무 이르고 --아침 10시면 집을 나서야 하는데 주말에 늦잠조차 잘 수 없다니! 프리미어리그 프리뷰 쇼인 BBC 풋볼 포커스도 볼 수 없어!-- 오후 5시 경기는 너무 늦습니다. 집에 오면 거의 9시인데 씻고 MOTD 보고 하면 바로 자야 되죠. 집을 나서는 시간이나 밥 먹는 시간이나 귀가 시간이나 오후 3시 경기가 하루 생활리듬에도 가장 잘 맞습니다. 보통 저는 킥오프 1시간 반 전에 집을 나서요. 집에서 에미레이츠까지는 튜브(런던 지하철의 애칭)로 넉넉히 잡아 약 40분 정도가 걸리는데, 아스날 역이 있는 피카디리 라인으로 갈아타는 곳에서부터 사람이 무지하게 복작이기 시작합니다. 가끔은 별세계를 보는 기분이에요. 환승역(킹스 크로스) 전까지는 축덕후, 아덕후들이 없는 평범한 일상 생활 속에 있다가 피카디리 라인으로 환승만 하면 아스날 스카프를 두른 사람들, 레플을 입은 사람들로 뒤덮인 아덕후의 세계로 들어오는 게 말이죠. 그리고 이때부터 슬슬 경기 전 흥분이 고조되기 시작됩니다.

처음에 에미레이츠에 경기를 보러 갔을 때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경기 자체보다 바로 경기를 보러 가는 구너들의 행렬(?)이었습니다. 아스날 역으로 가는 튜브 안에 꽉꽉 들어찬 구너들. 모두들 가는 곳은 똑같고, 다가올 경기에 대한 기대와 흥분 --얼마전 맨유전때는 수심으로 가득찬 얼굴들을 볼 수 있었음--이 얼굴이나 대화로 드러나죠. 동지 의식이라고 해야하나 연대감이라고 해야하나. 하여간 그런 묘한 공기가 있어요. 그리고 아스날 역에서 내려서 좁은 튜브역을 뚫고 나와 밖으로 나올 때부터 심장은 두근반 세근반.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며 에미레이츠가 눈에 들어올 때는 마치 선수들이 경기가 시작하기 전 터널에서 기다릴 때와 비슷한 흥분감이 들고는 합니다. 분위기가 좋은 날 다같이 노래를 부르면서 갈 때는 최고죠.

사실 지난주 아스톤 빌라전때 멋진 경험을 했었어요. 경기 시작 전에 유명한 아스날 펍에 갔었는데 아스날 멤버쉽 회원이여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닉 혼비도 여기서 만난 거.) 거기서 다같이 맥주 마시고 하다가 킥오프 15분 전 즈음해서 다같이 에미레이츠로 출발했었는데, 약 백명 쯤 되는 아스날 서포터들이 큰 소리로 아스날의 응원가를 떼창하면서 아머리 쪽으로 난 길을 통해서 에미레이츠로 향했던 것은 굉장한 경험이었어요. 중간중간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껴서 갈수록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이런 장면은 영화 <훌리건스 (The Green Street)>에서나 보는 건 줄 알았는데 이걸 직접 경험해 볼 줄은 몰랐습니다. 경기 자체보다 이런 것들 때문에 전 매치 데이를 더 사랑하게 된 것 같네요.

라이벌전때는 경기 시작 전부터 기싸움이 장난이 아닙니다. 어웨이 서포터석은 클락 엔드 옆에 붙어 있는데 그쪽으로 입장하는 구역은 홈 팬들과 갈라져 있어서 서로 볼 수 없고 넘어갈 수도 없습니다. 북런던 더비때 제 자리가 어웨이 서포터들 바로 위였거든요. 그래서 제가 입장해야 하는 문으로 들어가고 나자 막아진 벽(이라기엔 얇지만) 너머로 스퍼스 팬들의 응원가가 들립디다. 이 원정팬들을 제압하는 것은 클락 엔드쪽의 몫인 거죠. 스퍼스 팬들의 목소리를 지우기 위해서 그쪽으로 입장한 구너들은 더 크게 스퍼스를 조롱하는 노래들을 부릅니다. 이것도 정말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어요. 스퍼스 조롱하는 노래로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역시 가장 쉽고도 유명한 것은 "We hate Tottenham, We hate Tottenham, We hate Tottenham, We're the Tottenham haters!"

사용자 삽입 이미지
2. While the match's going on...

에미레이츠에서 본 10경기에 대해서는 다음편에서 다룰테니 경기에 대한 내용은 생략합니다.

에미레이츠의 분위기는 좋은 편입니다. 영국에서 가장 시끄러운 경기장은 아니나 또 그렇다고 썰렁하지도 않죠. 축구가 '비싼 돈 내고 보는 엔터테인먼트'가 되면서 어느 구장엘 가도 예전만한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는건 사실인지라. 신식 구장이기 때문에 삐까번쩍하기로는 최고입니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웸블리도 그 아치형 다리만 빼놓고는 에미레이츠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에미레이츠에 다녀온 주변 사람들은 모두 경기장 부럽다고 그랬고, 그러면 저는 '그거 짓느라 우리가 지금 이모양 이꼴' 이라고 대답해 주었습...하하하. ㄱ- 경기장 내외 시설이 좋은 건 두말할 필요가 없고 전 좌석에 엉덩이 아프지 말라고 쿠션이 깔아져 있는 경기장도 우리밖에 없을 겁니다. 풀햄의 홈구장 크레이븐 코티지에는 여전히 나무 의자가 남아있다고 하고, 스퍼스의 홈구장인 화이트 하트 레인은 처음 건설한 이후 보수만 하고 새로 짓지 않아서 낡은 티가 팍팍 난다고 하네요. 기둥이 시야를 가리는 사석인 곳도 있고. 하이버리에 비하면 에미레이츠의 분위기가 못하긴 하지만 그래도 전 에미레이츠에 전체적으로 만족합니다.

경기를 보러 갈 때마다 다른 구역에 앉았었는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클락 엔드입니다. 선수들 터널을 기준으로 해서 왼쪽 골대 뒤 코너 구역(5번 구역)이 노스 뱅크, 오른쪽 골대 뒤가 클락 엔드인데 전자는 가장 시끄러운 아스날 팬들이 앉는 곳으로 대부분이 시즌 티켓 홀더입니다. 경기장에서 응원가가 시작되는 곳도 여기고, 여기서는 90분 내내 서서 경기를 보는 것이 가능하죠. 전에 칼링컵 위건전때 노스 뱅크에서 경기를 봤었는데 정말 90분 내내 앉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 반면 클락 엔드는 앞서도 언급했지만 원정 응원단 옆쪽에 있죠. 노스 뱅크의 분위기도 좋지만 제가 클락 엔드를 더 좋아한 이유는 바로 원정 팬들을 맘껏 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기 앉지 못할 때도 전 경기중에 클락 엔드를 유심히 봐요. 바로 옆에 있는 원정 팬들과 서로 욕을 주고받거나 응원가 싸움을 하는 모습은 경기를 떠나서 그 자체로 재미가 있거든요. 특히 우리가 골을 넣고 나서 원정팬들에게 손가락질하면서 외치는 'Who are ya?'가 최고. 'You're supposed be f***ing shit' 이 노래도 좋아하고요 ㅋㅋ 북런던 더비때 우리가 4-2로 앞서나간 후 머리 바로 아래의 닭집팬들을 향해 실컷 조롱을 퍼부어 주는 것은 최고의 기분이었습니다. 비록 20분 후 지옥을 맛보게 되었으나.....

가장 좋아하는 응원가는, 아직 제가 아스날 응원가를 모조리 마스터한 건 아니지만, 'There's only one Arsene Wenger' 에요. 벵거가 터치라인 쪽으로 나왔을 때 벵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이 노래를 부르면 가끔 벵거가 화답을 해 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서포터들이 다같이 예이~! 를 외치죠. 뭔가 감독과 서포터들의 의사소통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좋아해요. 비록 빌라전에서는 아무도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이거 말고도 'By far the greatest team'도 좋아하죠. 링크 걸어놓은 유튜브 영상으로 확인하시길~ 선수 개별 응원가 중에서는 역시 전 로빈빠니까(..) 'Robin van Persie!(박수)'를 가장 좋아할 수밖에요. (먼산) 가끔 시끄러운 원정 응원단들이 올 때에는 우리가 응원에서 밀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얼마전에 빌라전이 그랬죠.. 빌라팬들 목소리가 훨씬 더 크게 들렸다는-_-; 이런 경우는 이 영상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맨체스터 시티 팬들인데, 대놓고 우리를 무시하는게 보이네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3. After the match

보통 전 경기가 끝난 후 경기장에 나오는 하이라이트까지 다 보고, 스탭들이 나가달라고 요청할 때까지 경기장에 남아 있습니다. 어차피 제때 나가봤자 6만 인파들에 휩쓸려 튜브나 버스 제대로 타기도 어렵고 시간도 엄청 오래 걸리죠. 언제 나가도 오래 걸릴 거면 차라리 경기장에서 기다리는게 낫지 않겠어요? 경기가 이긴 날에는 주차장 앞에서 선수들을 기다립니다. 아머리에서 뭘 질러줄 때도 있고. 아머리 바로 옆에 차량이 빠져나가는 출구가 있는데 거기서 기다리다 보면 선수들이 지나가죠. 보통은 다들 아무런 반응 없이 그냥 지나갑니다-_-; 알무니아같이 쇼맨쉽이 강한 일부 선수들(..)은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슝 지나가요. 선수들이 어떤 차를 타는지 보는 것도 또다른 재미. 전 차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같이 다니는 지인분은 해박하셔서.. 이 분한테 정보를 얻고는 합니다. 크크. 우리팀에서 가장 비싼 차 타는 애는 주루래요. 근데 전 차종을 까먹었어요. (쿨럭) 물론 그 중에는 면허증이 없어서 아빠 차 조수석에 얻어 타고 다니는 윌셔 어린이도 있지만 말입니다 우하하. 하지만 경기 지는 날에는 이런 거 없어요. 그냥 집에 가요.OTL

3시 경기를 기준으로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면 6시 정도가 됩니다. 배가 엄청나게 고프니 근처 맥도날드에서 배를 채우고 경기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다가 집으로 가는 튜브를 타죠. 가끔 시간이 맞으면 집(?)으로 돌아가는 원정팀 선수들 버스를 보기도 하는데 앞뒤좌우로 경찰이 호위를 하면서 갑니다.ㅋㅋㅋㅋㅋㅋㅋ 특히 스퍼스 선수들을 태운 버스는 경비가 특히 삼엄했죠. 생각하건데 이 나라에서 경찰이 가장 바쁠 때는 경기가 있는 날이 아닐까 합니다.

4. Till the next match

처음에 경기를 보러 가면서 생각한 건 '한 달에 한 번만 보자'였어요. 티켓값이 평균 40파운드입니다. 좌석에 따라, 경기에 따라 달라지지만 (칼링컵은 티켓값 동결로 10파운드밖에 안 하고 북런던 더비 같은 카테고리A 경기는 가장 싼 게 60파운드가 넘죠) 평균 지불 금액이 40파운드인데 한화로 약 9만원.. 이건 결코 싼 가격이 아닙니다.-_-; 하지만 그런 결심은 어디로 도망가고 4달동안 본 경기가 11경기(10홈+1원정)네요. 처음에는 특별한 일처럼 느껴졌던 에미레이츠 관전도 어느새 일상의 하나같은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우리 홈경기 있는 날에 중계를 보고 있으면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니까요. '내가 저기 있어야 하는데.. 여기서 뭐하는 겅미' 하는 기분이요. 한국으로 돌아가면 이 매치데이의 모든 것들을 무척이나 그리워하게 되겠죠. 비단 피치 위에서 벌어지는 90분의 경기뿐만이 아니라 안팎의 모든 것들이요. 매치 데이 그 자체가.

To be continued...


+ 사진은 모두 제가 찍은 것입니다.